뉴 이스라엘의 탄생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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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이스라엘의 탄생 배경
  • 박동현기자
  • 승인 2020.11.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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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는 물결은 1882년부터 시작되었다. 유대민족의 귀환 역사는 보통 1882년부터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한 1948년까지 시대별로 5대 이민군으로 구분한다. 즉, 1차 1882-l903 (20,000-30,000명), 2차 1904-1914 (35,000-40,000명), 3차 1919-1923 (35,183명), 4차 1924-1931(81,613명), 5차 1932-1948(366,061명)인데, 2차와 3차 대 이민 때 들어온 귀환자들이 이스라엘건국을 이루어 내는 지도 세력을 형성한다.
 
이스라엘 에스살렘 통곡의 벽 

이스라엘의 건국과 생존의 배경. I. 시온주의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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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건국은 나라를 잃고 전 세계에 흩어져 유리 방랑하던 유대 민족이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나라를 세우려는 시온주의 운동의 열매로서 이루어졌다. 이 시온주의 운동의 비전은 19세기 중엽부터 헤스, 핀스커, 헤르쩰 등과 같은 유대민족 선각자들에 의해 제시되었고, 다음 세대들이 이 비전을 구체화하고 발전시켰다.

자신들의 민족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온주의의 활동은 19세기말 데오도르 헤르쨀에 의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1896년 유대인 문제는 오직 유대국가 건설만으로 해결된다는 요지의 소책자 '유대국가'(Der Judenstaat)를 저술한다. 이 책자는 유대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1897년에는 그의 주도로 스위스 바젤에서 2백여 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시온주의 의회가 개최되고 '국제법의 지지를 얻어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을 위한 국가건설을 시온주의의 목표'로 결정한다.

II. 이스라엘의 건국과 국가발전.

한편,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는 물결은 1882년부터 시작되었다. 유대민족의 귀환 역사는 보통 1882년부터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한 1948년까지 시대별로 5대 이민군으로 구분한다. 즉, 1차 1882-l903 (20,000-30,000명), 2차 1904-1914 (35,000-40,000명), 3차 1919-1923 (35,183명), 4차 1924-1931(81,613명), 5차 1932-1948(366,061명)인데, 2차와 3차 대 이민시 들어온 귀환자들이 이스라엘건국을 이루어 내는 지도 세력을 형성한다.

특히 2차 대이민구룹에 들어온 벤구리온 (David Ben-Gurion: 초대수상), 벤-쯔비 (Yitzhak Ben-Zvi: 2대 대통령), 쉬프린작 (Yosef Shprinzak: 초대 국회의장)등이 1920년대부터 각종 유대민족의 자치조직들을 결성하여 팔레스타인 시온주의 운동 지도자로 부상한다. 이들은 주로 러시아와 폴란드 등 동구권 출신 유대인인데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팔레스타인에 자유와 평등의 이상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안고 돌아와 정착한 사람들이며, 대부분 비 종교인이다.

19세기 말 부터 러시아, 폴란드 등 이곳 동구권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풍요와 가능성의 나라 미국으로 몰려간다. 그러나 시온주의 운동에 공감한 일부 청년들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민족국가 재건의 꿈을 키워간다.

벤구리온을 정점으로 한 유대민족 지도자들은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돌아오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정착시키는 한편 정당과 유대인 기구 (Jewish Agency), 그리고 주민들의 대표 기구 등 준 국가적인 기구들을 조직하고, 지하 군사 조직을 창립하면서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주춧돌을 놓아 간다.

벤구리온을 비롯한 이들 지도세력은 1920년대부터 유대 민족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1948년 독립국가 건설에 성공하고, 1970년대 중반까지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각 분야의 발전을 주도했다. 나치 독일에 의해서 전 민족 구성원 삼분의 일(1/3)이 학살당하는 민족적 재앙을 겪기도 하지만 이러한 유대 민족에 대한 핍박과 학살이 역설적으로 유대 민족이 팔레스타인 땅에 돌아오는데 도움을 주며 결국 이스라엘 건국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스라엘의 비종교적인 학자들은 유대인 6백만 학살과 2차례의 세계대전 등 극히 일어날 확률이 낮은 연속적 우연한 사건의 발생으로 유대민족의 대대적인 귀환과 이스라엘의 건국이 가능했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독교인인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했음을 믿을 수밖에 없다.)

유대 민족 지도자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큰 흐름에 바탕 하여 밀려오는 도전과 기회를 잘 극복하고 활용하여 인류역사상 보기 드문 기적을 창출한 것이다.

이들은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이후 전개된 아랍연합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을 지키므로 서 시온주의 운동의 기본적인 목표 달성에 성공한다. 물론 당초 벤구리온 등 지도자들이 꿈꾸었던 자유와 평등, 번영된 복지국가의 이상이 어느 정도 실현 되었는가 에는 이론이 있지만, 당초의 기본 목표인 유대 민족 자체의 독립국가 창립과 그 유지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1882년 팔레스타인 땅의 유대인 인구가 2만 4천명에 불과하던 것이 1948편 65만 명(이스라엘 전체 인구 87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지금은 494만 명(이스라엘 전체 604만 명. 1997. 5월 현재)에 이른다. 인구 (1998년 통계) 총 6,041,400명(이스라엘 시민권 소유자) : 유대인 4,936,000명 아랍인 1,105,400명 종교별: 유대인 4,785,100명 모슬렘 899,800명 기독교인 128,700명 드루즈 99,000명기타 128,700명. 출처: "Statistical Abstract Of Israel 2000" (Central Bureau of Statistics)

전 세계의 유대인 인구에 대한 팔레스타인 인구의 비율도 1882년 0.3%에서 1948년 5%, 그리고 현재 33%로 늘어나 이스라엘이 명실 공히 유대 민족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48년 독립선언 이후 불과 3년 만에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두 배로 불어났다. 최근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약 50만 명의 유대인이 조국을 찾은 것을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끊임없이 이 땅에 돌아와 현대 이스라엘의 역사에 합류하고 있다.

독립선언과 함께 전쟁을 이끌어야 했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갑자기 밀려오기 시작한 동족들을 수용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전쟁의 피해를 복구할 틈도 없이 밀어닥친 동족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며, 학교를 짓고 직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 힘겨운 일이었지만,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를 오히려 민족 도약을 위한 기회로 생각하고, 국내외의 인적, 물적인 자원을 동원하는 한편, 민족 구성원의 힘을 모아 이들을 수용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벤구리온 수상은 독일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배상금을 받아 필요한 재정에 충당했으며, 미국, 유럽 등 해외에 있는 유대인들의 모금 운동과 자원 봉사를 통한 헌신 역시 큰 도움이 되었다.

벤구리온 수상이 이렇게 무리하게 일을 벌이고 사업을 확대해 나가는 것에 대해 경제학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현실과 경제 원칙을 무시한 무모한 국가 경영이라고 경고와 함께 제동을 걸곤 했다.

독일로 부터의 배상이 끝나면 재원은 고갈될 것이며 국가 재정이 파탄에 빠질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들 전문가들의 예측과 전망과는 달리 독일의 전후 배상이 끝나고도 이스라엘 정부 지도자들은 해외 유대인의 모금 운동, 각종 국제기구의 지원 등 끊임없이 다른 물적, 인적 자원을 개발, 동원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리더십, 국가 발전을 위한 국내외 유대인들의 열정, 그리고 당시 국제 경기의 호황과 유리한 국제 환경에 힘입어 이스라엘은 1950년대, 60년대 10% 이상의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1961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 소득이 73 달러에 불과할 때, 이스라엘은 이미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서 1인당 국민 소득이 814 달러를 기록했다 (당시 일본의 1인당 국민 소득은 502 달러였다)

1996년 이스라엘의 1인당 국민 소득은 16,800 달러다. 1980년EN 들어서 레바논 전쟁에 따른 전비 부담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어려움을 겪던 이스라엘 경제는 최근 회복되어 1992년 6.6%, 1993년 3.5%, 1993년 5.0%의 경제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이스라엘은 GNP의 24% 가량을 국방비에 투입했다. (일본 0.9%, 미국과 한국은 약 5.6%).

최근 구소련과 에디오피아 등지에서 몰려오는 수십만 명의 유대인 이민을 수용하느라 경제 개발 부문에 위한 투자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높은 과학 기술과 질 높은 인력 자원 개발로 이러한 난관을 극복해 가고 있다. 이스라엘은 과학 기술, 문화, 교육 등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이스라엘 아랍 제국과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평화 

예루살렘에 있는 황금돔은 이스라엘 소유가 아니다.

해외에 있는 유대인의 이스라엘로의 귀환과 이들에 의한 독립 국가의 건설, 그리고 경제, 사회 발전이 시온주의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이며, 이스라엘 정부가 항상 중요하게 여기는 정책이지만, 유대 민족이 극복해야 갈 최대의 난제는 그 무엇보다도 아랍 제국과 생존을 건 투쟁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1948년 5월 14일 독립이 선언되고 나서 24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이집트 6개국은 신생 독립국 이스라엘을 향해 사방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이스라엘은 8개월간 계속된 이 전쟁에서 유대인 인구의 1%에 가까운 6천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대부분 지역에서 아랍 연합군 부대를 물리쳤으나, 유대 민족의 최대 성지인 통곡의 벽 등 구 예루살렘 성안 유대인 지역을 요르단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나 이 독립 전쟁은 시작에 불과했다. 1950년대 들어 이집트에서 나세르 대통령에 와해 범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석유 자원이 풍부하여 국제 전략상 중요 지역으로 부상한 중동 지역에 소련은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시작했다. 소련이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등에 군사 원조를 제공하며 군비를 증강시킨 끝에 1956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함으로서 위기가 조성된다. 이로 인해 영국 프랑스와 이집트가 갈등 가운데 대립하게 되자 이스라엘은 '시나이 작전'으로 순식간에 시나이 반도를 점령함과 동시에 최신 장비로 무장한 이집트 군을 무력화(전사에 특이한)시킨 후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시킨다.

당시의 벤구리온 수상은 문제의 소지가 될 시나이 반도를 즉각 돌려주는 대신 소련의 지원을 받는 아랍 제국에 대항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제 국과 동맹 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할 뿐만 아니라 당시 기세가 등등하여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나세르 대통령의 기를 꺾는데 성공했다.

독립 전쟁을 포함 6차의 중동전중 [독립 전쟁 (1948), 시나이 작전 (1956), 6일 전쟁 (1967) 이집트와의 소모전 (1968-1970), 10월(욤 키푸르) 전쟁 (1973), 레바논 전쟁 (1982)] 현대 이스라엘 역사의 분수령이 된 것은 6일 전쟁이다. 애꾸눈(한쪽 눈 시각장애)의 모세 다얀 장군이 국방 장관으로서 활약한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로부터 골란 고원, 가자 지구, 요르단 서안 지구 시나이 반도 등 자기영토의 3배나 넘는 넓은 지역을 점령한다.

통곡의 벽을 다시 탈환하는 감격을 맛보며 순식간에 감람산, 구 예루살렘 성, 베들레헴, 헤브론, 세겜, 여리고 등 자기민족의 성지들을 순식간에 점령해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의 이면에는 2,000년 동안 핍박받아 왔던 유대 민족이, 팔레스타인 민족을 총칼로 지배하는 정복자의 입장이 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동안 거인 골리앗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운 다윗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이스라엘은 어린 소년에게 총을 들이대는 잔인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국민의 사기는 충천했으며, 비록 조그만 영토와 인구를 가진 소국이지만 중동 지역에서는 그 누구도 상대하기 어려운 군사 대국으로 부상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자만심에 빠져있던 이스라엘의 허를 찔러 치욕감을 안겨준 전쟁이 1973년 10월에 발발한 10월(속죄일) 전쟁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따라 설치되어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자랑하던 바르 레브 선 (Bar Lev Line)이 이집트 군의 기습 공격에 힘없이 무너지고 속죄일을 맞아 손을 놓고 있던 병사들은 전선 곳곳에서 패퇴하여 전사하였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통해 국토를 확보했지만, 국경이 복잡하다. 엷은 베이지색이 이스라엘 영토이다. 오르단서안과 가자는 팔레스타인 

골란 고원에서는 시리아군의 탱크 공격에 곤욕을 치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열을 가다듬은 이스라엘 군은 미국의 신속한 무기 보급과 미군 첩보 위성의 도움을 받아 결국 시리아와 이집트를 격퇴하는데 성공했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는 등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무엇보다도 슈퍼맨의 이미지와 함께 자신만만하던 이스라엘 군의 자존심을 흔들어 놓았다.

그 동안 2.000년만의 민족국가의 재건, 계속된 전쟁에서의 승리, 그리로 경제 이론과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경제성장 등 기적 같은 일련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고 계속적인 발전을 이루어 가는데 장애가 되었다. 시대 상황은 급속히 변화하는데 이에 대응하는 지도자들의 사고와 대처 방식은 변하지 않음으로서 대응 능력을 상실케 된 것이다. 여장부 골다 메이어 총리는 이 전쟁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도 문책을 당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절망적이던 화약고 중동에 평화의 싹이 돋는 계기가 되었다. 다섯 차례에 걸쳐 아랍 제국의 선두에 서서 이스라엘과 싸운 끝에 상처만 얻고 빚더미에 눌리게 된 이집트가 소련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미국의 도움을 걷어 이스라엘과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스라엘과 전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스라엘 역시 대 아랍 제국과의 계속된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당시 300만의 작은 인구와 경제 규모로 1억 5천만의 대 아랍 제국을 상대하기는 힘이 부친 모양새 이었다.

특히, 아랍 제국 중에 인구 규모나 전력 면에서 최강인 이집트와의 평화는 아랍 국가들 간의 분열을 촉진시켜 대 아랍 투쟁에서 이스라엘을 한결 수월케 하였다. 1977년 메나헴 베긴 총리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을 이스라엘에 초청하고 1977년 ll월 20일, 사다트 대통령은 적국 이스라엘의 국회인 크네세트에서 극적인 연설을 함으로서 전쟁의 악순환의 고리를 풀고 평화에의 물꼬를 텄다.

1979년 3월 2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에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의해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석유가 나던 시나이 반도를 1982년까지 이집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평화를 향한 낙관적인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82년 레바논 전쟁이 발발하고 베이루트 근방, 사브라, 샤틸라에서는 수많은 양민이 이스라엘 군의 방관 하에 레바논의 팔랑헤당 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1967년 이후 이스라엘 군의 점령 통치가 계속되던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의 상황 역시 심각했다. 1987년 팔레스타인 민족의 이스라엘군 통치에 항거하는 대 봉기 즉 인티파다가 폭발하였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물멧 돌을 던졌던 것처럼 팔레스타인의 어린이들은 이스라엘군 병사에게 돌을 던지며 이 대 봉기에 앞장서 싸웠다. 그 많은 전쟁과 테러에도 꿈쩍 않던 이스라엘 군도 이 "추하고 기묘한" 전쟁에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스라엘의 학계, 언론계, 그리고 작가 등 지식인 계층의 양심적 인사들이 이스라엘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레이보비츠 교수 같은 이는 2000년 동안 핍박과 함께 고난 받았던 유대 민족이 총과 칼로 타민족을 핍박하는 정복자로 변했다며 민족적인 양심과 도덕성 회복을 호소했다. 국제 사회에서도 비난이 끊이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지도 세력은 분열되어 방향성을 잡지 못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에 큰 영향을 준 전쟁이 1967년 6일 전쟁입니다. 바로 이 전쟁에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요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그리고 동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이 점령한 것입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 지역을 이스라엘이 통치해 왔다.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 (1979년)을 시작으로 물꼬가 트인다. 1992년 이스라엘에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집권하고 나서 “그 동안 우리가 수많은 전쟁으로 많은 피를 흘렸는데 최소한 우리 자손들만큼은 피를 흘려서는 안 되겠다, 평화적으로 어떻게 해결해 보자” 이런 결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1993년 오슬로 합의를 시작으로 두 민족 간 평화과정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평화과정은 이츠학 라빈 전 총리의 암살, 네탄니야후 강경우파 리쿠드당의 집권, 수많은 유혈 테러 사건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당초 일정보다 지연되긴 했습니다만 8년가량이 지난 지금까지 이 평화과정은 꾸준히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1994년 예리고와 가자에서부터 이스라엘군이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가 실시되었습니다.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에 30년 가까운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가자에 돌아와 자치정부를 이끌어왔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43%지역에서 철수했고, 이 지역에 팔레스타인 자치가 실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민족간 평화과정의 마지막단계에 와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외교, 국방 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독립 국가를 이스라엘이 1967년 점령했던 요단강 서안과 가자 전 지역에 창립하겠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역 거의 전역(98%)에서 철수하라. 수도는 동 예루살렘이다. 점령지역에 건설한 이스라엘 정착촌 모두 철거해야 한다. 그리고 해외에 쫓겨 난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을 보장하라. 이렇게 요구하고 있고 샤론 총리 당선자는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점령지역 중 43% 정도 철수했는데, 더 이상은 안 된다. 동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유대교 성지로서 조금도 내줄 수 없다. 정착촌 하나도 철거하지 못하겠다. 이런 강경한 입장입니다.

IV. 이스라엘 건국과 생존의 요인

유대 민족은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핍박과 고난, 민족 멸절의 위기를 극복하고 결국 독립 국가 재건에 성공한다. 이스라엘은 1948년 독립한 이래 아랍 제국과 여섯 차례의 중동전을 치르는 등 수많은 도전과 위기를 극복하면서 독립을 지켜 오고 있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기술 등 각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유대 민족의 성공 요인은 무엇인가? 인구 600만의 소국 이스라엘이 어떻게 2억의 아랍 제국과 싸우며 독립을 지킬 수 있었는가?

유대 민족은 우리 한민족처럼 명석한 두뇌와 높은 교육열이 있는 민족이다. 세계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민족이며, 미국 유명 대학 교수진의 20%를 유대인 교수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곳 이스라엘의 과학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율 역시 그 어느 나라보다도 높다. 노동 인구 1만 명 당 자연과학 분야에서 석사 이상의 학위를 소지한 자가 4.6명 (미국 2.6명, 일본 0.5명, 영국 2-5명이며, 국제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비율이 노동 인구 1만 명 당 60명 (미국 30명, 일본 12명 영국 30명 독일 23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유대 민족의 창조성과 교육 우선의 문화 형성에는 성경(구약 성경)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성경은 유대 민족 신앙의 경전이자 가장 기본적인 법규범이며. 그들 민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 성경과 함께 좀 더 구체적인 관습과 전통을 규범화시킨 구전 율법(미쉬나)에 토론과 설명이 덧붙여져 편찬된 것이 탈무드이다.

유대 민족은 성경과 탈무드 공부를 통해서 학문과 교육을 중시하고 생활화하는 문화와 전통을 창조, 계승해 왔다. 성경 연구를 통해 민족문화의 바탕이 되는 히브리어가 보존될 수 있었다. 민족 종교인 유대교, 성경과 탈무드 공부가 생활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교육과 학문 중시의 전통, 선민의식, 그리고 핍박과 고난의 삶 가운데서 형성된 가족주의와 민족 성원간의 유대감, 이러한 요소들이 지난 2천 년간 자신의 민족성을 지녀 오면서 민족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유대 민족 역사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이스라엘의 독립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측면이 있으나, 민족 내부의 다양한 세력 간 갈등을 조정하고 민족의 에너지를 결집, 밀려온 도전과 기회에 창조적으로 응전한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2천년만의 독립국가 재건이라는 기적을 가능케 했다. 이들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민족의 국내외 인적, 물적 자원을 개발하고 동원하여 밀려오는 도전을 극복해 가고 있다.

개발 도상 국가의 급속한 경제 개발 추진 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도층의 부정과 부패 현상을 거의 볼 수 없고,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보다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스라엘 지도층의 행태가 하나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냉전 체제가 와해된 이후 유일한 슈퍼파워로 등장한 미국의 지원, 이곳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도움 역시 큰 힘이 되고 있다.

이들이 미국의 각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독립과 생존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선민의식, 창조적인 교육, 민족 성원간의 유대 의식과 가족주의,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국제 정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조건들이지만, 이러한 조건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고 극대화 시켜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 가는 것은 지도자들의 몫으로 간주되고 있다.

출처 : 위키 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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