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든지’(cold) ‘뜨겁든지’(hot)?(계 3:14-18) 하라. 신성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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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든지’(cold) ‘뜨겁든지’(hot)?(계 3:14-18) 하라. 신성욱 교수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0.09.1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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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그들의 문제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끄집어내어 설명하신다. 15절, 16절 말씀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라오디게아 시대 수로 

성경 66권 가운데서 그 해석상에 있어서 요한계시록에서 만큼 많은 이단이 나온 책은 없을 것이다. 모든 성경이 각기 나름대로의 해석 원리와 기준을 갖고 있듯이, 계시록 역시 그 나름의 독특한 해석의 원칙과 기준이 있다. 그것을 몇 가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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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샌드위치 기법, 둘째, 반복점층법, 셋째, 상징적 의미의 수(number)들이 활용되고 있고, 넷째, 지역 배경과 특징을 가지고 의미를 전달하는 기법이 활용되고 있다.

이 중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3장 14-18절까지의 이야기는 다른 여섯 교회의 경우와 동일하게 주님께서 당시 그 지역의 독특한 환경과 특징을 활용하여 의미를 전달하신 내용이다.

본문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주님의 메시지이다. 다른 여섯 교회와 마찬가지로 이 본문은 당시 그 지역의 배경과 특징을 충분히 고려해서 해석해야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적인 교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우선,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 그에 대한 교인들 스스로의 진단을 살펴보자. 1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들 스스로 부자요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데는 그럴 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라오디아 시대 수로
라오디아 시대 수로

당시 라오디게아 지역은 세 가지로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첫째, 은행에 금(현금)이 많았다. 금은 요즘으로 말하면 현금에 해당되었다. 얼마나 은행에 금이 많았으면 지진이 일어나서 건물이 무너지고 엄청난 경제적 손해가 끼쳐졌음에도 로마로부터의 도움의 손길마저 뿌리쳤을 정도다.

둘째, 안약(眼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라오디게아에는 헤로필로스의 의료법에 따른 의과대학이 있었고, 또 유명한 약을 제조하는 제약회사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 특히 안약은 눈병에 특효약이었다.

셋째, 옷감으로 소문난 산지였다. 이곳은 루커스 계곡의 넓고 기름진 땅에서 목양과 목화 지배가 활발하였다. 고대의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는 라오디게아의 목양에서 얻은 털의 부드러움과 그 연함이 미래시안(Milesian)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재물과 의약품과 직물로 여유 있는 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운 삶이라 충분히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자가 진단에 대한 주님의 진단은 180도로 달랐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진단은 어떠했을까? 17절 하반절에 기록되어 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요약해서 말하면, 주님은 그들이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지적하신다.

재물과 의약품과 직물, 세 가지의 장점을 지닌 그들에게 오히려 그 세 가지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말씀이셨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문제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끄집어내어 설명하신다. 15절, 16절 말씀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필자 신성욱 교수
필자 신성욱 교수

정리하면, 그들이 차갑든지 뜨겁든지 해야지, 미지근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여기에 ‘차든지’(cold) ‘뜨겁든지’(hot)란 표현이 나온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여기에 영적인 의미를 집어넣어 ‘차가운 신앙’과 “뜨거운 신앙‘으로 해석해왔다. 그런데 ‘뜨거운 신앙’은 이해가 쉬운데, ‘차가운 신앙’을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함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엉터리 해석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다행한 것은 이 표현이 당시 라오디게아 지역의 특성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그들만이 지니고 있는 지역적 배경을 활용하여 말씀하신 것이란 사실이 뒤늦게나마 밝혀졌다. 세 가지의 큰 장점을 지닌 라오디게아 지역은 물이 좋지 않은 결점도 갖고 있었다.

그들은 16킬로미터 떨어진 골로새에서 차가운 음료수를 수로를 통해 끌어왔다. 뿐만 아니라 9킬로미터 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뜨거운 유황 온천물과 탄산수 온천수도 수로를 통해 끌어왔다.

문제는 차가운 온천수나 뜨거운 온천수와 탄산수가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까지 오는 동안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로 변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것을 마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증을 유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16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여기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는 내용은 잘못된 번역이다. 제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내 입에서 구역질이 나서 토할 것만 같다.” 다시 말하면 구토를 유발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무더운 여름에 우리가 물을 마시고 났을 때 입에서 “야, 참 시원하다!”라거나 “이거 정말 몸에 좋구먼!” 이런 소리가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물을 마시자마자 “욱!”하고 토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물로서의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다.

 당시 라오디게아는 수로로 연결해서 끌어오는 물의 오염이 심각했었다. 차가운 물이든 뜨거운 물이든 배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까지 도달하는 동안 식어서 미지근해지는 것도 문제였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그곳 모사공장의 폐수, 그리고 환자의 가족들이 카리안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매일 잡는 짐승의 피와 오물 등이 라오디게아에 흘러 들어온 물과 합쳐지다보니 더욱 미지근해지고 오염이 되어 구토증을 유발하는 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그곳의 물은 갈증을 해소할 만큼 시원하지도 않고 병을 치료할 만큼 뜨겁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미지근한’(lukewarm) 것은 ‘열매 없음’(unfruitfulness)과 ‘효력 없음’(ineffectiveness)을 의미한다. 이처럼 ‘차가운 신앙’과 ‘뜨거운 신앙’의 의미로 주님이 말씀하신 것 아니라, 차가운 것은 차가운 대로 시원한 냉수처럼 유익을 주고, 뜨거운 것은 뜨거운 대로 온천수처럼 유익을 준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주님께 열매도 맺지 못하고 효력을 전혀 나타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세상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만끽하면서도 영적으로는 전혀 알맹이 없고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을 주님이 지적하고 책망하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문제만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친절하게도 수정하고 갖춰야 할 대안까지 마련해주셨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향한 주님의 해결책이 18절에 언급된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재물과 의약품과 직물 이 세 가지를 자랑하는 그들에게, 영적으로는 바로 그 세 가지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음을 지적하신 주님께서 제시한 대안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은행에 있는 물질적 금이 아닌 ‘금보다 귀한 성도의 확실하고 견고한 믿음’(genuine & firm faith, 벧전 1:7)을 뜻하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는 것이다. 둘째, 그들의 입는 화려한 옷이 아닌 ‘성도들의 옳은 행실’(계 19:8)을 의미하는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면하라는 것이다. 셋째, 눈에 바르는 안약이 아닌 영적인 분별력을 갖게 하는 안약을 발라서 보게 하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갖출 것을 다 갖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신들이 육적으로 자랑하는 바로 그 세 가지에 있어서 영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받았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부요하고 유명세를 탄다 하더라도 영적으로 부요하고 주님이 인정하시지 못하는 삶을 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주님이 오늘 나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셨을 때 나는 과연 주님께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오늘 하루도 주님으로 하여금 구토를 유발케 만드는 열매 없는 신자가 아닌, 언제나 잘했다 칭찬받을 수 있는 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필자 신성욱 교수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이다.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공부했음, University of Pretoria에서 공부했음, 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음,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언어학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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