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경작하는 삶, 윤헌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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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칼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경작하는 삶, 윤헌준 교수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1.07.3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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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년 공학자의 비전 윤헌준 (숭실대 기계공학부 교수) 다시금 지식을 공유해 쓰러진 영혼을 일으키는 회복의 걸음이었다. 이는 지적 만족과 유익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학문 청지기로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계기가 됐고,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하나님께서 가라 명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은 캠퍼스였다
기계공학 이미지 출처 구글 사진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날마 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주(主)되 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Kuyper)가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으로 설파 했듯이,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시고 죽은 자들 가운 데서 먼저 나신 예수님(골 1:15-20)께서 왕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는 삶의 ‘전(全) 영역’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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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 영역에 있어, 진리의 상아탑인 대학에서 ‘학문’에 정진하는 삶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학문을 대하는 기독교의 태도에는 양극단이 존재했는데, 영지주의적(gnostic) 이원론에 갇혀 학문을 속(俗)하다고 여기거나, 세상과 구별됨 없이 학문을 기복신앙적 성공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우리 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요 8:32)는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사실과 명제가 일치하는 상황이 아니라, 예수 님의 말씀에 거함으로써 하나님과 결속하여, 얻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학자가 추구하는 진리란,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에 감탄하고, 타락한 인간의 문화적 산물(전공 영역)을 정화하는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필자는 고등학생 때 과학교과목 중에 물리를 좋아했는데, 특히 힘과 운동을 다루는 역학(力學, mechanics) 단원에 큰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호기심에 기초 해 현상을 탐구하는 순수학문보다는, 축적된 지식 체계를 실생활에 적용하는 응용학문을 선호해 기계공학(mechanical engineering)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배워서 남 주자”는 비전은 품었으나 구체적인 소명의 자리가 어딘지 막연했던 2008년 여름, ‘크리스천 과학기술인 포럼’이 대학생을 대상으로 주최한 ‘소외 된 90%를 위한 공학 설계 아카데미’에 우연히 참가해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접하게 됐다.

공학 주도의 산업혁명이 시대를 혁신했으나 부작용으로 사회적 갈등과 불균형을 초래했다면, 다시금 지식을 공유해 쓰러진 영혼을 일으키는 회복의 걸음이었다. 이는 지적 만족과 유익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학문 청지기로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계기가 됐고,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하나님께서 가라 명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은 캠퍼스였다. 이제는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하는 청년 공학자로서 걷고 싶은 삶의 기대를 나누려 한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삶이다. 공학자 (engineer)라는 용어는 14세기에 엔진(engine)에서 유래했으며, 엔진의 어원은 발명의 재주 및 영리함을 뜻하는 라틴어 잉게니움(ingenium)이다. 따라서 공 학은 새로운 도구를 창조함으로써 삶의 지평을 넓혀 온 고군분투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학적 창조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가진 특별한 존재(창 1:27)이기에 가능하다. ‘무(無)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지만, 주어진 재료로 새로운 도구를 만드는 영감(靈感)을 인간에게도 허락하신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분(출 3:14)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 사역의 동역자로 초대하신 것 자체가 은혜이다.

둘째, 왜곡된 공학의 원형(原形)을 회복하는 삶이다. 세상은 ‘최소 비용-최대 이윤’이 공학의 가치라고 가르치고, 불멸과 신성(神性)을 지향하는 기술의 바벨탑을 쌓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느부갓네살의 꿈에 등장한 하늘에 닿을 듯이 높게 올라가는 나무처럼 성취와 견고함을 숭상하는 자기애(自己愛)적 공학을 거부하고(단 4:1-18) 재물(맘몬)이 지배하는 억압과 착취의 공학이 아닌, 정의와 공의로 행하는 공학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렘22:1-12)

필자  교수
필자 윤헌준 교수(숭실대기계공학부)

셋째, 하나님께서 보편적으로 베푸시는 ‘일반 은총’ (common grace)을 드러내는 삶이다. 예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등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증언하신다(마 5:45). 공학은 제품 개발 및 사회 인프라 건설 등을 통해 신자와 불신자 모두를 섬기는 사랑의 유통이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에서 ‘경작하다’의 히브리어 아바드(עבד)는 영어로 일하다 (work), 섬기다(service), 예배하다(worship) 등을 뜻 하며, ‘지키다’의 샤마르(ׁשָׁ ַמַָר)는 유지하다(keep), 주시하다(watch), 보존하다(preserve) 등을 뜻한다.

즉, 창조 세계를 경작하고 지키는 공학자의 삶이란, 학문하는 ‘일’을 통해 자연의 질서(예: 물리법칙)가 담긴 지식 체계를 ‘보존’하고, 새로운 도구를 ‘창조’해 동시대 이웃을 ‘섬기며’, 친환경 기술로 자원을 ‘유지’해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삶이다.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에 순종(창 1:28)해 공학 영역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공공의 선을 이루며, 하나님을 사랑하고(신 6:5, 마 22:37) 이웃을 사랑하는(레 19:18, 마 22:39)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공학자가 되길 갈망한다.

필자 윤헌준은 숭실대 기계공학부 교수이다. 서울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해 박사학위 (Ph.D)를 받았고, 미국 조지아공과대 박사후 연구원을 지냈다. 서울 정릉교회(예장 통합) 청년이며,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실행위원 및 <신 앙과 삶> 편집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공학 영역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마6:10) 역사에 참여하는 증인의 삶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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