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한반도 문명
기독교는 1517년을 기점으로 유럽에서 중세 암흑시대를 종식시키는 빛을 밝히며 근대를 열었고, 이후 지난 500년간 세계사적 문명 변화를 주도한 삶의 태도, 사상 및 인식론적 기반을 형성시켜왔다.
세계인들이 모델로 삼는 국가들은 대부분 기독교적 정신과 제도의 기반위에 있다. 국민소득 상위 35개 국가이면서 인구 1천만이 넘는 국가는 미국,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독일,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대한민국, 스페인 등 총 11개국이다. 그중 9개국은 서구문명의 주도국이며, 대부분 개신교적 기반 위에 있다. 5백만 명 인구 이상 국가로 확대한다면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벨기에, 오스트리아 등이 포함되어 기독교적 기반은 명백하며 지난 5백 년 문명사는 기독교(프로테스탄트)와의 확고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근현대 대한민국도 명확하게 기독교적 기반 위에 있다고 평가할만하다. 기독교 문명과 유럽 문명을 분리할 수 없듯이 대한민국이 성공국가로 진입하게 된 것은 한국 사회의 기독교 확산과 개신교적 제도 및 정신의 내면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Ⅱ. 대한민국 기독교의 3大 프로젝트
한국의 근대문명 체계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 것은 폐쇄적 봉건체제가 부정되고 근대체제로 이행을 시작한 1876년 개방·개항을 기점으로 한다. 한국 근대문명의 변화와 전환의 주요 계기는 개항 이후 펼쳐진 기독교 문명 및 기독교 활동자들의 정신과 생활규범의 재정립에 바탕한다. 특히 1882년 미국과의 수호조약이후 문명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요 활동은 기독교 조직과 활동에 의한 것이었다. 1885년을 전후로 가장 고립된 폐쇄, 낙후체제인 한국에서 펼쳐진 기독교의 활동은 문명사적 전환과 대한민국 대비약의 시점이다.
기독교의 첫 프로젝트는 물론 봉건적 사회의 종식이었다.
1880년대 이후 개신교의 과제는 한반도에서 수백 년 계속되어온 미신과 토속신앙의 극복, 봉건적 계급제도, 남녀차별, 사농공상(士農工商)적 신분제도와 차별 폐지에 있었다. 그 결과 근대적 기본권 개념과 천부인권적 자유에 입각한 개인의 시대를 여는 토대를 만들었다. 근대 교육, 근대 의료체계는 모두 개인의 삶의 질과 생명을 중시하며 전근대적 봉건적 삶의 존재양식을 바꿔내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종교를 넘어 근대적 가치와 근대적 삶을 형성시키는 문명사적 변화를 만드는 기수였다.
기독교의 두 번째 프로젝트는 반식민투쟁이었다.
자주독립국가의 지향과 근대 민주공화제 건립의 기반이 된 3.1운동 정신이나 독립문을 만들어 세운 독립협회 활동, 만민공동회 사건, 물산장려운동, 105인 사건 등 근대 독립 국가를 향한 주도적 활동가 모두 기독교였다. 정동교회와 배재학당을 기반으로 했던 이승만 대통령이나 평양의 조만식, 이승훈 등 민족지도자도 모두 기독교적 기반에 입각했다.
기독교의 세 번째 프로젝트는 전체주의 공산-독재체제와의 투쟁이었다.
신의주 의거나 황해도 신천투쟁 및 공산주의를 대상으로 한 반공투쟁의 주역들도 거의 기독교였다. 물론, 전남 야월교회·진리교회·옥구교회, 충남 병천교회, 서울 신당교회 등 6.25전쟁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입고 재기의 중심에 섰던 것도 기독교였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지난 140년간 반봉건투쟁과 반식민투쟁은 물론, 전체주의에 대항한 반공산투쟁의 선두에 섰고 그런 과정을 넘어 근대 문명적 대한민국을 만드는 초석이자 최전선에 있어왔다.
나아가 기독교는 개인의 중시, 장사와 상업에 대한 천시의 극복, 기업과 무역에 대한 자존감, 사농공상적 사회의 타파, 타인에게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보상체계 등을 형성시켰다. 수백 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과거급제와 사시-행시 등 공직자 중심에서 기업중심으로의 사회변화도 마찬가지다.
신분을 획득하거나, 권력중심적 지배자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필요로 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가 성공하는 사회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상공업사회로의 변신이다. 교회와 기독교 정신이 없었다면 봉건적, 전통적 한국 사회가 오늘날과 같이 근현대사회로 바뀌지 못했을 것이다.
기독교는 일(toil)과 직업(vocation)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다. 노동은 더 이상 부역이 아니라, 신의 소명(calling)이 된 것이다. 주어진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인식론은 근대를 여는 혁명이었다.
결론적으로 명-청시대와 조선시대를 500년 가까이 물려받은 한반도는 폐쇄적 중국의 영향과 문명적 고립을 겪으면서 근대화가 매우 늦어졌고, 서구 및 기독교와의 접촉은 불과 130여 년 전부터 가능했다. 그러나 ‘늦어진 한반도의 근대 문명’과 기독교의 만남은 한반도 문명의 완벽한 변신의 계기가 되었다.
Ⅲ. 기독교정신과 한국의 자유민주 질서
자유민주 질서는 기독교적 신앙의 자유를 지키려는 분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지켜지고 발전된 것이며, 평안도, 황해도 및 함경도의 기독교들까지 월남하여 끝까지 지켜낸 결과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평안, 황해도 등의 장대현 교회, 산정현교회, 창동교회 등 한반도 기독교 세력이 함께 만들고 지킨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1945년 이후 한반도에서 전개된 공산주의와의 대결과 대한민국의 건국, 그리고 1950-3 6.25전쟁에서 가장 투철하게 전쟁에 임하고, 가장 많은 순교와 피해를 본 것은 개신교였다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가 보여주는 바, 그대로이다.
그럼에도 근현대 140년 대한민국 역사에 기독교의 역할과 대규모 희생을 일체 담고 있지 않다. 특히 공산 전체주의 세력과 싸웠던 것과 대규모 희생에 관한 기록은 단지 순교 관련 교회들과 교단별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 국가사회적 역사에서는 배제되어 있다. 대한민국이 여전히 공산 전체주의로부터 명백한 위협을 받는 현재 상황은 물론이고, 한반도 북쪽에는 우리민족 2천만 이상이 민족유린과 문명파괴의 상황에 놓여있는 사실에 비춰볼 때, 기독교의 역할과 집단희생의 역사가 묻혀져 있고, 잊혀져 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언어도단적이다.
기독교의 역할과 집단희생에 대한 역사 배제는 곧 배제한 세력들 중심으로 대한민국 역사가 과대 대표(過大代表)되어있거나 독점되었다는 의미이다. 자유민주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전체주의에 대항했던 기독교의 역할과 집단희생에 대한 진상규명 및 정당한 역사기록과 교육은 대한민국이 지금 현재 맞이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은 물론 올바른 미래를 지향해가는 토대이자 힘이다. 김광동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6월9일 영락교회 교육관에서 열린 한복협 조찬기도회에서 발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