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준칼럼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대통령 탄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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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칼럼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대통령 탄핵
  • 박동현기자
  • 승인 2016.11.29 2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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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 자신이 “내가 만약 한나라당이 받은 불법 대선자금의 10분의 1 이상을 받았다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쓸데없는 말을 함으로써 “10분의 1이 넘었으니 약속을 지키라”는 한나라당의 공세가 결
 전 미국대통령 클린턴과 전연방 하원의원 김창준

요즘의 한국정세와 맞는것 같아 오래전에 한국서 연재됐던 글을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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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사에 가장 수치스러웠던 날은 아마도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돼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날일 것이다. 탄핵의 표면적 이유는 국법질서 문란, 노 대통령 자신과 측근들의 비리와 그로 인해 국정을 이끌 도덕적 명분의 부재, 그리고 경제위기 상황 초래 등이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노 대통령 자신이 “내가 만약 한나라당이 받은 불법 대선자금의 10분의 1 이상을 받았다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쓸데없는 말을 함으로써 “10분의 1이 넘었으니 약속을 지키라”는 한나라당의 공세가 결국 탄핵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두 달 뒤(5월14일) 헌법재판소가 “국기를 흔들만한 법률 위반이 없다”고 결정해 탄핵소추가 기각됐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국가에 큰 혼란과 분열이 야기됐을 것이다.

미국의 230년 정치사에서 연방 하원에 의해 탄핵을 받은 대통령은 단 2명 뿐이다. 17대(1865) 앤드류 존슨(Andrew Johnson)과 42대(1992) 빌 클린턴(Bill Clinton)이 그 주인공들이다. 앤드류 존슨은 링컨 대통령 재임 당시 부통령이었다.

당시 링컨은 남북전쟁 승리 후 압도적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는데(1865년 3월4일), 취임한 지 불과 한 달 열흘(4월14일) 만에 수도 워싱턴에 있는 포드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다 암살돼 존슨이 헌법 규정에 의해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공교롭게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로 그 당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맡게 됐는데 그 사람의 이름도 존슨(Lyndon Johnson)이다. 남북전쟁의 영웅, 노예해방의 아버지로 불리면서 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 받는 링컨의 뒤를 이은 존슨이 탄핵을 받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는 대통령이 장관 후보자를 의회에 추천할 뿐 마지막 인선 결정권이 없다. 마지막 인선 결정권은 의회에 있기 때문에 의회에서 인준한 장관을 대통령이 사전동의 없이 해임할 수는 없다. 존슨 대통령은 국방장관 에드윈 스탠튼을 의회의 동의 없이 파면했는데, 이에 화가 난 골수 공화당 의원들이 1868년 헌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대통령을 연방 하원에서 탄핵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남북전쟁 종료 후 애써 생포한 남부연합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와 총사령관 로버트 리를 사면한 데 대한 북쪽 골수 공화당 의원들의 반감 때문이었다. 존슨은 상원에서 한 표 차이로 탄핵을 면했지만 정치생명은 이미 끝난 뒤였다. 같은 해 대선에서 민주당은 현직 대통령인 존슨을 외면하고 뉴욕 출신 세이무어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지만 결국 공화당의 그랜트에게 참패했다.

미국과는 달리 한국 국회의 장관 인준 청문회는 하나의 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국회의 인준 동의 여부에 상관 없이 대통령이 자신의 뜻대로 장관을 임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울뿐인 청문회를 왜 국민의 세금을 써가면서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서로 목청을 높이고 상대방 헐뜯기에 골몰하는 쇼로 보일 뿐이다.

나는 클린턴 대통령 탄핵 당시 현역 의원으로 마지막 탄핵 투표 때 공화당 당론에 따라 찬성표를 던졌지만 개인적으로는 클린턴 대통령을 좋아했기 때문에 고민이 컸었다. 투표가 끝난 뒤에는 왜 미국 의회에는 무기명 투표가 없는지 원망까지 했었다.

클린턴이 누구인가. 1946년 8월19일 생으로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난폭한 술주정뱅이 의붓아버지 밑에서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1963년 청소년 대표로 백악관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면서 정치인의 꿈을 키웠다. 워싱턴에 있는 조지타운 대학에서 국제정치 학사 학위를 받았고, 로드 장학생(Rhodes Scholarship)으로 1968년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에서 1년을 보냈다.

이듬해 육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을 받았지만, 영국으로 돌아가 그 곳의 미국대사관 앞에서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을 벌였다. 나중에 귀국해 예일대학 법과대학원에 진학했고 그 곳에서 부인 힐러리를 만났다. 아칸소 주의 검찰총장을 거쳐 36세로 미 역사상 최연소 주지사에 당선됐다.

나는 클린턴 대통령을 여러 번 만났다. 그는 내가 공화당 출신임에도 불과하고 만날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는데, 내 가족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그에게 놀라움과 함께 호감을 가졌었다.

클린턴 주위에는 항상 미녀들이 있었다. 클린턴과 내연의 관계였다는 미녀들이 한 둘이 아니다. 심지어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어린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오럴 섹스까지 즐겼다고 하는데, 끊이지 않는 섹스 스캔들이 문제였다.

결국 쌓이고 쌓인 성 스캔들 문제 등으로 공화당 출신 의원들이 탄핵을 결정했다. 역대 대통령의 명예를 더럽히고 성스러운 백악관에서 대통령답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드디어 1998년 12월19일 연방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됐다. 네 가지 죄목 중 두 가지는 부결됐고, 나머지 두 가지(대배심 위증, 공무집행 방해)는 통과됐다.

네 가지 중 하나만 통과돼도 탄핵이 가능하다. 통과된 두 가지 탄핵 조건을 연방 상원 의원들에게 통보했다. 마지막 결정권을 갖고 있는 상원에서 탄핵을 결정짓기 위해서는 전체 의석 중 3분의 2인 67표의 찬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하원에서 통과된 두 죄목이 상원에서는 모두 부결됐고 클린턴은 탄핵을 면할 수 있었다.

어차피 클린턴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인기는 70%에 육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원에서 탄핵안 통과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압도적이었다. 결국 하원에서의 상징적 탄핵으로 일단락됐다.

요즘(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 시위대가 들고 휘두르는 플래카드에 “이명박 아웃, 이 대통령 탄핵”이라는 문구가 쓰인 것을 보면 가슴이 섬뜩하다.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이처럼 쉽게 대통령 탄핵을 선동하는 경솔한 행동은 옳지 않다.

미국에도 230년 동안 딱 두 번 대통령 탄핵안이 나왔지만 두 번 다 부결됐다. 한국의 민주정치 역사에 더 이상 오점을 남기지 않기를 바란다.

글임자 김창준, 미연방 전하원 3선의원, 미국 대통령선거 "30일 전에 "트럼프 대통령을 대비하라" 책을 출간. 예측 적중으로 절대 다수 언론 정보 등에 놀라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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