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출산에 대한 가정사역자의 한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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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출산에 대한 가정사역자의 한 시각
  • 박동현 기자
  • 승인 2018.05.15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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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물을 차량에 싣고 파는 플랜카드가 웃음을 빵 터지게 만들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굴비’(‘영광’과 ‘굴비’는 빨간색 칼라였다) 콧수염을 기르는 동호회 이름은 ‘전국 코수모스’다.
▲ 송길원 목사

저 출산 논의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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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협 5월 조찬기도 및 발표회에서, 송길원 목사 발표전문)

연극을 상영하던 극장에 뜻밖의 화재가 발생했다. 자칫 잘못 하면 큰 화재가 발생할 긴급 상황에서 극장주는 한 배우를 불러 관객들을 급히 대피 시킬 것을 지시했다. 배우는 무대 위로 뛰어 올라 지금 화재 경보가 울렸으니 바깥으로 질서정연하게 피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그게 연극 상황인줄만 알고 꿈쩍도 안 했다. 오히려 그 연기력에 박수까지 치는 것이었다. 배우는 다급했다. 간곡한 어조로 비상구를 손가락질 하며 빨리 피하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관객들은 그 간곡한 어조조차 연기로 생각하면서 더 큰 박수를 보내는 것이었다. 배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덥석 꿇어앉으면서 "곧 파멸이 닥치니 제발 빨리 피하라."고 절규하듯 외쳤다. 관객들은 "우리를 진짜 같이 믿게 만드는 저 연기를 좀 보라."며 또 다시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불길은 극장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덮쳐 버리고 말았다.

엄청난 고통과 슬픔으로 상징되는 ‘소돔과 고모라’의 재앙이 밀어 닥치고 있다.

‘저출산으로 인한 사회와 국가의 붕괴’가 바로 그것이다. 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합계출산율이 1970년 4.53명에서 2003년 1.19명으로 떨어지더니 출산율은 세계 꼴찌, 감소 속도는 세계 1위인 아주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

또한 한 연구에 따르면 현 합계출산율(1.2명)이 계속 지속될 때 4846만 명인 한국 인구는 950년 후인 2954년에는 단 한 명도 남지 않는 국가가 된다고 한다. 그동안 숱하게 이야기해 왔지만 믿지를 않았다.

이제는 정책 입안자만이 아니다. 전 국민이 진지하게 귀 기울어야 한다. 그리고 비상구를 찾아야 한다. 한국의 저 출산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책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우리 귀에 익숙한 슬로건들을 정부가 내걸면서 가족계획 사업을 시작한 것이 1962년이었고,

그 정책의 결과로 합계출산율이 2.1명 이하로 떨어진 해가 1983년이었는데도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96년까지 출산 억제 정책이 계속 유지된 것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 그 이후엔 저출산 고령화 사회 위원회까지 대통령 직속으로 만들어졌지만 예산 낭비만 컸고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았었다.

▲ 발표회 진행자 김윤희 교수(한복협 부회장/FWIA 대표)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정부에만 돌려댈 일도 아니다. 결혼을 굴레로, 자녀를 혹으로 여기며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만을 추구했던 이기적인 사회 풍조도 한 몫을 했다. 지금도 “하나도 버겁다”고 힘겨워 하고 차라리 잘못 키울 바에야 안 낳는 게 낫다고 포기해 버리는 이들도 많다.

이로 인해 본인과 사회가 겪게 될 부메랑 같은 재앙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물 건너 불구경하듯 팔짱만 끼고 있는 꼴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재빨리 비상구로 안내를 해야 한다. 프랑스나 스웨덴을 뛰어넘는 출산 장려 정책과 복지 시설의 확충, 가정 친화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신혼부부에게 생활수당을 지급하는 다른 여타 나라의 주택 지원을 포함하여 다양한 결혼장려금 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은 비상시국이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개인은 개인대로 공동체적 사고로 ‘더불어 살아야 할’ 세상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정신만이 저 출산의 재앙을 피해갈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연극을 관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속히 비상구를 찾아야 할 때인 것이다.

감동-유익-재미의 미학으로 다시 돌아가야

1백여 년 전,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S. 게일(James Scarth Gale1863~1937)이 한국을 찾았을 때 일이다. 한국민들의 농사짓는 방법이 특이했다.

밭일이던 논일이던 홀로 하지 않고 꼭 세 사람 또는 다섯명이 무리지어 했다. 그들의 손에 들려진 농기구는 특별한 발명품에 가까웠다. 긴 나무에 부삽이 달린 것인데 가장자리에 매여 있는 끈을 부여잡고 밭을 갈거나 무너진 논둑을 다지는 것이었다.

일은 매우 민첩하고 활력이 넘쳤다. 일할 때 부르는 노래는 흥겨웠다. 그들에게 일은 노동이 아니라 놀이였다. 중간 중간 가지는 휴식시간은 먹거리로 풍성했고 온갖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하나의 축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미학의 세 요소(쓸모 있거나 재미있거나 감동적이거나)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이 세 가지 요소로 다시 돌아설 수는 없을까?

한 교회가 유아 방을 황토방으로 만들었다. 큰 감동이었다. 유배실과 같던 유아실이 치유실로 바뀐 것이다. 작은 관심이 어머니들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켰다. 주일학교 학생들의 감소는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한데 이 아이들에게 글로벌 매너를 가르쳤더니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를 찾아왔다. 유익이 있어서다.

교회의 커리큐럼을 전면적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우리는 너무 구태의연하다. 개발된 프로그램을 수 십 년 동안 울궈먹고 있다. 스마트 폰에 하루 종일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이들의 시선을 자연으로 돌릴 수는 없을까? 아니 아이들 홀로 버려진 주일학교에 부모들이 함께 뛰어들 수는 없을까?

 저 출산 해법에 대한 비판 하나

정부산하 연구기관인 KDI(한국개발연구원)가 저출산 문제 해법으로 ‘혼전동거’와 ‘혼외출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고 혼전동거와 혼외출산을 확산시키겠다는 발상이 어떻게 국책연구기관에서 나올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혼전동거를 선택하는 심리에는 복잡한 법적 절차를 생략하고 우선 급한 성적인 만족을 추구하겠다는 동기가 숨겨져 있음을 왜 모르는가?

만약 KDI식 해법을 도입한다면, 대한민국은 ‘동거 공화국’이 될 것이다. 동거 실험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신비로운 성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동거가 건강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완충지대인양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동거가 만연한 서구에서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증명되었다.

영국의 경우 동거 커플이 갈라설 확률은 결혼한 부부보다 3~4배가 된다고 한다. 또한 동거 커플이 자녀를 많이 낳을 것이란 기대도 근거가 부족하다.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혼외출산 비중이 40~60%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내걸지만, 그것은 건전한 가정생활의 파괴현상을 보여줄 뿐이다.

교회가 해답을 내놓지 않으면 이러 따위의 일을 여전히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프레임의 전환-저 출산을 다 출산으로

모든 시작은 ‘이름’으로부터 시작된다. 주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렇다. 이름부터 부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어지는 게 있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은 천지창조에 인간을 참여시키면서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했다. 이보다 더 감격스런 일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이름은 존재 그 자체다. 어떻게 불리어 지느냐가 곧 미래가 된다.

강화도를 ‘유배지’로 말하는 순간 버려진 섬이 된다. 하지만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말하는 순간 강화도는 역사 유적지가 된다. 관광지가 되고 유물을 간직한 보물섬이 된다. 이름 지어진 틀(frame)이 성격을 규정한다. 또한 사람들은 정해진 틀을 통해 사건을 해석한다. 네모 창을 통해 달을 보면 달조차도 네모로 보인다. 동그란 창을 통해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은 푸른 공이 된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존재보다는 프레임에 의해 결정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이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이었다. 클린턴은 이 한마디로 대선 국면을 경제 문제로 전환시켰다. 이슈를 선점했다. 이래서 선거는 프레임 싸움이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3대 과제는 ‘일자리 창출, 4차 산업, 저출산 해소’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 대변인은 이렇게 발표했다. “초저출산율을 탈피하기 위해 사회경제적 구조와 인식, 문화가 함께 바뀌어야 하는 총체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이를 위해 “자녀 양육의 국가 책임 구현과 결혼·출생 양육에 친화적인 사회 제도로의 변화를 이행하는 데 있어서 전 국가적 총력 대응을 해나가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이 국민들에게 먹혀들까.

생각해 보라. ‘농촌봉사활동’과 ‘농촌 일손돕기’는 피곤하다. 내가 왜 농촌봉사를 떠나야 되나 주저하게 만든다. 하지만 ‘농촌체험’은 다르다. 능동적으로 만든다. 나의 삶을 위한 변화를 충동질한다.

요즘은 음식점도 간판부터 새로 내건다. ‘좋은 날 또 오리’는 오리집 간판이다. 당구장은 ‘승승당구’ 쉽고 잊혀지지 않는다. 한 번은 수산물을 차량에 싣고 파는 플랜카드가 웃음을 빵 터지게 만들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굴비’(‘영광’과 ‘굴비’는 빨간색 칼라였다) 콧수염을 기르는 동호회 이름은 ‘전국 코수모스’다.

절로 미소가 번진다. 건강식품의 ‘달리다 굼(뱅이)’는 성경에 나오는 ‘소녀야 일어나라’라는 말 ‘달리다굼’(막 5:41)에다 ‘뱅이’를 살짝 붙였다. 굼뱅이도 달린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갑자기 활력이 넘친다.

그간 우리도 모르게 속고 살아온 용어가 하나 있다. ‘피로회복’이다. 이 한마디가 피로사회를 만들었다. 피로는 해소해야지, 왜 피로를 회복하나. 회복해야 할 것은 건강이 아닌가.

‘저출산’이란 말은 피곤하고 지겹다. ‘고령화’ 역시 따분하다. 사람들은 고개부터 흔든다. 이미 기피용어다. 심리적으로 피하고 싶은 것이다. 젊은이들은 더더욱 출산을 왜 우리에게 떠넘기느냐고 항의한다. 문재인 정부가 내건 저출산의 고민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감동이 없으니 어떻게 하나.

‘저출산’ 대신 ‘다출산(多出産)’이라고 하면 번성과 풍요가 떠오른다. 함께하고 싶다. ‘고령화’보다 ‘장수건강사회’로 바꿔보면 어떨까. 갑자기 가슴이 뛴다. ‘명랑투병’이라 했을 때 병을 이겨내고 싶은 용기가 꿈틀거리듯 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겨야 한다. 맞는 말이다. 여기서 새 부대란 다름 아닌 새로운 프레임이 아닐까?

#. 교회의 과제: 교회 주도형 공공보육

“지금까지의 저출산 대책들은 실패했다, 충분하지 못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대통령은 정직했다. 에둘러 말하지도 않았다. 대통령의 말이 아니라도 국민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실패한 것 맞다. 출산 축하금 몇 푼 준다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을. 출산휴가가 는다고 해서 그 휴가를 얻기 위해 아이를 낳지도 않는다. 국민은 영리하다. 선심성 정책은 감동을 못 준다. 감동이 없으니 움직일 리 없다. 구호도 아니다.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이 필요했다.

대한민국은 2026년이 되면 초고령사회에 접어든다. 2031년이 되면 한국 총인구가 줄어들게 된다. 이미 많은 경고가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고 모른 척 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 국가의 근간을 흔든다는 이야기도 물 건너 불구경이었다.

답은 간단했다. 출산이 아닌 보육이었다. 맞벌이 가구 자녀들이 ‘학원 뺑뺑이’로 내몰리고 있다. 저학년 자녀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엄마들은 1만5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열악한 방과 후 돌봄 제도가 젊은 엄마들을 경단녀(경력단절여성)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최근 5년 이내 한 해 평균 퇴사자가 8천명 수준으로 보도되었다. 이러니 누가 기저귀 몇 장 더 나눠준다고 아이를 출산하려 하겠는가?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 위원회가 이를 간파했다는 점이다. ‘보육공공성 강화’가 바로 그것이다. 위원회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돌봄 절벽’ 문제 해소를 위해선 초등 돌봄과 방과 후 학교 연계를 강화하고 학교와 지역사회가 협업하는 돌봄 모델 마련과 확산을 위한 논의도 이어갈 방침임을 밝혔다. 이와 관련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국민청원을 내 놓았다. 그 요지가 이렇다.

“취학 전 영유아를 가진 젊은 부모들은 공공보육시설 확충을 간절하게 바란다. 하지만 늘어난 국가부채와 낮아진 경제성장률로 인해 재정 여력이 소진된 탓에 정부는 짧은 시간에 공공보육시설을 많이 짓기가 어렵다. 부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지으려면 많은 돈과 시간이 든다.

학생 수 감소에 따라 생기는 초등학교의 여유 공간 일부를, 다시 말해서 지금 특활공간으로만 사용하고 있는 교실의 일부를 공공보육시설로 활용할 것을 청원한다.”

이 점에 있어서 가장 큰 경쟁력을 갖춘 공공시설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교회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주일 외엔 많은 시설이 유휴공간으로 남는다.

공공재로서 교회시설을 사회봉사의 터전으로 제공할 수 있다면 이것이 진정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고 선교적 교회가 되는 일이 아닐까? 교회의 기능은 단순한 공간제공을 넘어선 인력수급과 사회 신경망 구실까지 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수년 전, 강준만교수는 정당정치와 관련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이 제안한 ‘교회 모델’ 즉, ‘서비스 모델’을 꺼낸 일이 있다. “저는 결혼식, 장례식 때 교회만큼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을 본 적이 없어요. 신도나 그 가족이 아프면 교인들이 와서 간병까지 해줘요. 친척보다 더 낫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지금은 사라진 한국의 ‘대가족제’를 유지합니다.

오늘 태어난 아이부터 내일 돌아가실 분까지 하나의 ‘가족’입니다. 실제로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정서적 유대감이 큽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는 아예 집을 한 채 구해서 상설 노인정을 운영합니다.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곳도 많습니다.”

이제 정부주도형의 출산 장려운동이 아닌 종교계가 나서 국가의 짐을 덜어줄 수는 없을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고 보낸 한국교회가 세금 문제를 넘어서 세상을 감동시키는 일을 찾아내라면 단연 이 일을 꼽고 싶다.우리는 안다. ‘마을’이 아이를 키워야 하고 ‘우리’가 나보다 똑똑하다는 사실을. .. 송 길 원 목사. (가족생태학자,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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