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제일 더러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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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제일 더러운 나라?
  • 박동현 기자
  • 승인 2019.07.23 1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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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위통을 벗지는 않았지만 짧고 누런 상의(저고리) 아래로 젖을 내놓고 다니는데 그것이 유행인지는 모르겠다. 길 양편으로는 가축우리보다도 훨씬 못한 흙과 풀로 만들어진 작고 납작한 집들이 끊임없이 마치 버섯단지처럼 이어져 있고 부유한 동네에 가서야 다소 기와집들을 볼 수가 있다.”
노컷 조선 왕조 실록 책커버
노컷 조선 왕조 실록 책커버

1800년대 초엽부터 우리나라에는 유럽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도(India)의 시성 타고르가 <동방의 해 돋는 고요한 나라>라고 시를 쓰기도 했지만, 그는 우리나라에 와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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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교사들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각종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냈다. “서울에는 넓은 거리와 좋은 건물이 몇 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도시는 내가 본 도시 중 가장 더럽고 보잘 것이 없다. 거리의 더러움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것은 1885년 서울에 들어온 미국 감리교단의 의사 겸 선교사인 닥터 셔우드 홀의 기록이다.

또 하나의 간단한 기록을 인용해보자.

미국 선교사 알렌이 평양에 들어가서 목격한 광경을 본국에 보고한 내용이다. 당시 평양은 서울보다 더 번창한 상업도시이며 근대도시였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직항로가 나 있었고 외국문물이 쏟아져 들어와서 좋은 물건을 사려면 서울에서 평양으로 가야 했다.

해방 후까지도 평양으로 레코드를 사기 위하여 보따리상들이 드나들곤 했다. 가장 개화된 도시가 평양이었던 셈이다. 그 평양 거리에 온 알렌의 보고 문서다.

“사람들이 이러한 환경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 기이할 따름이다. 거리는 마차 한 대가 지나가기에도 비좁으며 진흙탕 길에 온갖 짐승들의 배설물이 깔려 있어서 숨을 쉬며 지나가기가 무척 어렵다.

그 길을 태연히 오가는 남자들은 어른 아이 상관없이 모두 제멋대로 헝클어진 (봉두난발) 머리에 위통을 벗었으며 바지는 처음 색깔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남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맨발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여성들 복장
조선시대 여성들 복장

여자들은 위통을 벗지는 않았지만 짧고 누런 상의(저고리) 아래로 젖을 내놓고 다니는데 그것이 유행인지는 모르겠다.

길 양편으로는 가축우리보다도 훨씬 못한 흙과 풀로 만들어진 작고 납작한 집들이 끊임없이 마치 버섯단지처럼 이어져 있고 부유한 동네에 가서야 다소 기와집들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그 선교사 한 사람만의 기록이라고 볼 수가 없다. 대부분의 보고서가 공통적이다.

“서울의 대감들이 몰려 살고 있는 부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커다란 기와집의 담장 앞으로는 시궁창 하수로가 있는데 대부분 씻고 버린 채소나 쓰레기들이 쌓여 있는 바람에 부패한 하수가 좁은 길로 넘쳐 나와 악취가 범람하고 있다.

그런 길을 태연하게 대감들은 가마나 말을 타고 지나간다. 그런 불결한 위생상태 때문에 서울과 대도시에는 끊임없이 전염병이 돌아 서울 인구의 10퍼센트가 콜레라와 페스트로 죽어나가는 참상이 빚어지기도 한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빛나는 문명국이 급속도로 쇠퇴하여 온 도시가 슬럼화되어 버렸단 말인가? 이런 말이 의심쩍은 분은 초기 선교사들의 저서를 몇 권만이라도 뒤적여보기 바란다.

조선 당시의 거리 모습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런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어림하여 볼 수 있는 것들은 일제가 들어온 뒤 도시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그 당시의 사진 자료 등을 참조할 수밖에 없는데 서울에서도 큰 거리라는 것이 우마차 2대가 겨우 비켜갈 수 있을 정도였다. 나머지 작은 도로는 겨우 몇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국도 역시 산길이나 밭길 수준이었다. 수레가 다니지도 않고 그저 사람이나 말이 지나가기에 적합한 소로였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도로를 닦는다는 개념이 없었다. 전국을 잇는 도로라는 것은 모두 농로 수준밖에 안 됐다. 가마 한 대만 지나가면 족하다.

도로의 의미라는 것은 왕의 행차나 중국 사절들이 통과하는 경우에만 해당이 될 뿐 백성들이 통행하는 도로는 그냥 사람이 다닐 정도로 그쳤다. 심지어 일부러 길을 닦지 않았다. 길을 잘 닦아 놓으면 오랑캐나 내부의 적들이 침략했을 경우 오히려 불리하다는 주장이 조선의 도로 정책에 대한 생각이었다.

조선을 통틀어 양곡의 운반도 육로가 아니고 해운으로만 했으니 사실 도로라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도로가 이렇게 협소하고 그런 기반 위에서 도시가 형성되었으니 청결이라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동물들의 배설물과 인분, 넘치는 하수, 온갖 쓰레기, 그런 곳에서 틈만 나면 발생하는 온갖 전염병, 그것이야말로 조선 후반의 고질적인 도시 풍속도였던 셈이다.

조선에서 도로 조성계획이라는 것은 1896년 대한제국 정부가 한성 내의 도로 폭을 규정하는 내부 명령을 낸 것이 그나마 최초에 속한다. 이때 비로소 4대문 내의 종로와 왕궁 주변의 도로를 점령하고 있던 불법 가게들이 철거되고 고종은 서양에 다녀온 개화파들의 건의에 따라 덕수궁을 중심으로 하여 방사형 중심 도로망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획뿐이었다.

일제는 이런 계획 대신 거주의 편의성 위주로 격자형 도로 계획을 세워 비로소 근대식 도로들을 닦기 시작했는데 현재 서울의 중앙부가 이때 모두 확장되고 신설되었다. 새로 도로를 만들었다고 해서 신작로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런 좁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주지, 거기에 불결하기 짝이 없는 환경 때문에 필연적으로 전염병이 휩쓸었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는데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도 병의 원인이 쥐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서울의 무당들은 대호황을 누렸다. 집집마다 고양이 그림을 내걸었고 무당들은 굿판을 벌여 고양이 울음을 내면서 콜레라 귀신을 내쫓았다. 20세기 초반에 말이다.

서양에는 기차와 자동차가 다니고 수도 보급과 빌딩과 병원들이 일반화되고 있을 때 서울의 숨김없는 모습들이다. 콜레라에 걸리면 다리가 아래에서부터 콕콕 쑤시며 발을 떠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쥐가 무는 형상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쥐 귀신이 몸 안에 들어와서 생기는 병이라 하여 그런 소동이 벌어졌다.

서울에 고아원이 처음으로 생겼을 때는 그 앞에 성난 군중들이 모여들어 폭동상태가 되었다. 서양 사람들이 아이들을 모아 키우면서 살을 찌운 다음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사진관도 플래시가 터지는 것을 보고 사람의 혼이 그 순간 빠져나가면서 서양 사람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는 소문으로 폭동이 일어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가 개통되자 서울의 풍수지리상 나라의 종말이 다가왔다면서 백성들이 거리를 가로막고 운행을 막았으며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세계 유례없는 아름다운 한복을 자랑하고 백의민족임을 자랑하지만 이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복식이다. 일 년 내내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 백성들에게 흰옷만 입게 한 것은 우리 양반들이다. 게다가 한 벌만 가지고 입기 때문에 나중에는 본래 색깔이 무엇이었는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 옷을 깁고 또 기워 입었다. 보통 백성들은 그 한 벌이 잠옷이고 작업복이고 외출복이었다. 그나마 없거나 아껴 입으려고 여름철에는 웃통을 벗고 살았다.

정자 위에서 주인 대감이 기생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그 아래에 대감의 말을 보살피고 있는 노비는 웃통을 벗은 봉두난발의 차림새다. 이것은 근래 방영된 KBS 진품명품에 소개된 한 충청도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의 내용이다.

상민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한다. 당연히 흰옷은 얼마 가지 않아 누런 옷, 검은 옷이 되어 버린다. 흔한 풀물을 들여도 됐을 것이다. 각종 열매로도 얼마든지 염색을 할 수 있을 터인데 굳이 흰색만 입게 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깔의 옷은 양반들만 입었다. 상민들이 혹시라도 색깔 있는 옷을 입으면 처벌을 받았다.

1671년(현종 12), 부응교 홍주국이 상소하여 백성들이 흰옷을 몰래 물들여 입는 폐단에 대하여 말하였다. 미국의 선교사 게리 길모어의 기록에서는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것으로 비난하지만 그것은 조선인들의 옷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때가 타기 쉬운 흰옷을 입기 때문에 더 더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아침에 깨끗한 옷을 입고 나가지만 돌아올 때는 검정 옷이 되어 있으니 더 유별나게 더러워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어린애들의 옷은 목과 소매 끝부분이 더 빨리 더러워지고 여인네들은 머리 기름을 바르는데 그것이 옷에 닿아 시커메지고 애초의 색깔과 대조가 되면서 더 한층 더러워 보인다. 왜 굳이 이런 흰색을 고집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화려한 궁중비사만 다루느라고 백성들의 이러한 실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마차 한 대 다니기도 불편한 좁은 거리, 당연히 가마를 타거나 걸어서 다닐 수밖에 없던 그 거리들이 그렇게 더럽고 어지러웠다는 기록들은 차마 믿기지가 않는다.

조선 시대 내내 도시 계획을 세워 도로를 확장하고 가옥들을 개선하며 위생 관념을 위해 의복을 개량하고 질병 예방을 위해 무슨 시책을 펼쳤다는 기록은 찾기가 힘들다.

1960년대 새마을운동 이전을 기억하는 세대라면 전국적으로 당시의 도로가 얼마나 좁고 집들이 작고 거리가 더러웠는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서울이 고향인 방송작가 김행호씨의 글에 의하면 60년대 종로의 길들은 좁은 거리가 온통 인분천지여서 날마다 몇차례씩 발을 씻었다고 한다. 시골이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한 치라도 자기 마당을 넓히려고 도로 쪽으로 담장을 내는 바람에 수레도 들어갈 수 없는 마을이 태반이었다.

자기 집안의 쓰레기를 태연히 집 밖으로 던져 버리고 이웃집은 아랑곳없이 자기 집만 돋보이게 하려는 본성, 자기 가게의 간판이 옆집보다 어떻게든 튀어야 한다는 전투적인 경쟁심리. 이런 성품은 모두 어디에선가 은연중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그 원천이 바로 조선 오백 년의 속성이라 한다면 과장이라고 할 것인가.

도시 계획에 있어서도 선진국은 전체적인 균형을 중시하여 집단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일본이나 유럽을 돌아보면 어디를 가 봐도 자연이 비교적 아름답게 보전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그런 개념이 없다. 조금만 풍치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 그 일대를 점령하는 것은 모텔과 매운탕집, 삼겹살집들이다. 전체 도시 계획이라는 것은 없이 일부 그 동네 단지계획만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조금 비하하여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부분적으로 거리가 깨끗해지고 화장실이 비약적으로 개선되었지만 산천 전체를 통틀어 평한다면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지저분한 축에 들어간다.

얼마든지 계획도시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계획도시는 경남 창원시밖에 없다. 그렇게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운 가게들만 산천을 뒤덮다시피 하고 있는 것은 결국 우리 피 속에 지저분한 생활 본성이 있기 때문인데 그 본성은 어디서 온것일까.

<참고 문헌>

조선왕조실록/문명과 야만: 타자의 시선으로 본 19세기 조선(조현범)/한국 근대사의 풍경: 모던 조선을 거닐다(노형석)/닥터 홀의 조선회상(셔우드 홀)/조선 천주 교회사./착한 미개인 (프레데릭 블레스텍스/박해기 선교사들의 한국관 (김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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